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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일요일 아침의 자동 알람, TV 애니메이션들

반환점 통과자 2026. 6. 2. 11:19

80년대 국민학생들에게 일요일은 사실상 한 주 중에서 유일하게 늦잠을 잘 수 있었던 날이었다. 학교이건 직장이건 주 6일제로 돌아가던 시절이니, 아침시간대에 게으름을 피울 수 있던 유일한 날이 당연히 일요일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학생들을 엄마가 깨우지 않아도, 알람시계가 울리지 않아도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휴일을 맞아 늦잠을 자려는 부모님들마저 깨우게 만드는 원흉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일요일 아침시간 TV에서 방영해주던 애니메이션들이었다.

가장 오래된 기억으로 남아있는 일요일 아침의 애니메이션은 '공룡대전쟁 아이젠보그'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시청한 지 무척이나 오래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깊은 인상으로 기억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애니메이션과 특촬물이 결합된 아주 독특한 콘텐츠였기 때문이다. 두 명의 남녀 주인공과 깍두기 등장인물 등으로 구성된 대원들이 각자의 머신들로 악역 공룡들과 대결하다가 힘에 부치면 남녀 주인공이 합체하며 거대 로봇(?)이 되어 맞선다는 구성도 독특했다. 특히 거대한 드릴이 전면에 달린 비행메카는 동시기에 장난감으로도 출시되어 인기를 끌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방영했던 시기가 1979년 정도라고 하니 대략 4~5세 정도의 어린 시절에 보았던 것인데도 기억이 생생한 걸 보면 어지간히 인상깊었던 콘텐츠였던게다.

1981년부터 MBC에서 일요일 아침 시간에 방영을 시작한 '은하철도 999'는 아마도 일요일 아침 시간에 방영한 애니메이션 차원을 넘어 한국 공중파 TV에서 방영한 애니메이션 중 가장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었던 콘텐츠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애니메이션이 일요일 아침은 만화영화를 해주는 시간대라는 걸 각인시킨 존재이기도 하고,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넘어 본방사수와 정주행을 완성한 최초의 방송 콘텐츠로 기억에 남아있다. 철이와 메텔이라는 두 주인공이 은하철도를 타고 여러 행성을 돌아다니며 다채로운 에피소드를 겪는 로드무비성의 구성도 흥미로왔고, 모자와 제복에 파묻힌 땅딸하고 시커먼 차장과 각 행성에 만나는 캐릭터들도 인상 깊었다.
가장 인상깊게 남아있는 것은 이 여정 중 '시간성'이라는 곳에 머물렀을 때 '하록선장'이 등장했던 것이다. 그림체가 비슷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동시기에 방송사마저 다른 곳에서 방영 중이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 경계를 넘어 등장한다는 크로스오버가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왔었는데, 정확하게 이 두 애니메이션이 어떤 내용으로 연결되고 교차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뭐지?뭐지?했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마쓰모토 레이지의 유니버스를 알게 된 건 한참 뒤의 이야기.

같은 시기 유사한 시간대 KBS2 채널에서는 '디즈니 만화동산'을 방영했는데, 은하철도 999와 방영시간이 조금 겹치는지라 제대로 보지 못했던 기억이 남아있는 애니메이션이다. 은하철도 999가 끝나고 바로 채널을 돌리면 한창 이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었고, 얼마가지 않아 끝나서 매우 아쉬워했던 기억이 남아있고, 아마도 남자아이들 기준에는 똑같은 아쉬움을 주던 프로그램이 아니었나 싶다.
기억하기로는 이 프로그램은 처음부터 이 제목은 아니었고, 명칭이 몇 번 변경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대로 조금씩 달라져서 시청 패턴을 일정하게 잡을 수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미키마우스, 도널드 덕, 구피 등의 디즈니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들도 구성되어 있었는데, 매회마다 연결되는 내용이 아니라 옴니버스 식의 구성이어서 본방 사수의 의욕이 더 떨어졌지 않나 싶다.

 '천년여왕'은 은하철도 999가 방영이 끝난 뒤 1983년부터 동시간대 MBC에서 방영을 시작한 애니메이션이다. 누가봐도 같은 그림체에다가 주인공 남자아이 캐릭터도 똑같은 모양새와 철이라는 똑같은 이름, 여주인공인 천년여왕도 이름은 다른데 아무리봐도 메텔과 똑같이 생겨서 도대체 이게 은하철도 999와 무슨 관계의 내용인지 계속 머리 속에 물음표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나 대중적으로 은하철도 999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국민학생이 이해하기에는 상당히 난해한 내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충 세기말을 맞아서 지구의 위기가 예고되어 있는데, 천년여왕이라는 존재가 지구를 지키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 위기를 가져오는 악역인건지 모호한 설정인데다가 이 설정도 흥미진진하고 긴박하게 전개되는 게 아니라서 흥미가 금새 떨어졌던 기억이 있다. 이 때문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기억상으로는 방영 자체가 흐지부지 끝나서 결말이 어찌 되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애니메이션이다.

'들장미 소녀 캔디'는 이렇게 흐지부지 끝난 천년여왕의 뒤를 이어 MBC에서 방영한 애니메이션인데, 남자아이 특성 상 시청의욕이 높지는 않았지만, 딱히 다른 대체 콘텐츠가 마땅하지 않아 다소 심드렁하게 지켜봤던 만화영화였다. 고아원 출신의 여자아이가 각종 고생을 겪으면서 성공(?)에 다다른다는 게 당시의 나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스토리는 아니었다. 물론 동년배 여자아이들의 반응은 확연하게 달랐겠지만.

같은 기간 KBS2 채널에서 방영된 '요술공주 밍키' 역시 여학생 취향의 애니메이션이었는데, 캔디보다는 훨씬 더 자주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파스러운 면이 거의 없는 현대물이라는 점이 개인적인 취향에 더 맞았던 것 같고, 결정적으로 밍키가 성인 여성으로 변신할 때의 장면은 남자 국민학생들의 비밀스러운 환호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소녀 취향의 애니메이션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거대 합체로봇이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던 것이 인상깊게 기억되고 있다. 당시 시청자 입장에서 일요일 아침시간의 만화영화는 MBC가 주역이었는데, 그것에 대한 KBS의 일종의 반격과도 같은 편성으로 느껴진다.

1984년 MBC에서는 들장미 소녀 캔디가 종영한 뒤를 이어 '우주전함 코메트'를 방영했는데, 여러모로 남자 국민학생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는 애니메이션이었다. 미래의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물이라는 장르에다가 독특한 외형의 전함과 더불어 로봇, 고무인간 등 주인공과 함께 하는 파티원의 구성 등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애니메이션이다. 일요일 아침 MBC 만화영화 전속 가수인 김국환이  주제가 역시 높은 인기를 얻었다. 같은 시기 만화잡지 보물섬에 고유성이 동일한 내용으로 연재한 '우주특공대'도 기억에 남는데, 아마도 당시 시대 상황으로 유추해보면 저작권 따위는 무시하고 그려낸 것일테다.

우주전함 코메트 이후 일요일 아침시간 방영했던 애니메이션들은 조금씩 인기를 잃어갔던 느낌이 든다. 개인적으로도 이 시기 그다지 흥미를 끌었던 애니메이션이 잘 기억나지 않는데, 그 와중에 1986년 방영을 시작한 '스타에이스'는 남자 국민학생 아이에게 꽤나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이 기대는 시청하면 할 수록 와르르 무너지게 되는데, 오프닝에서 보여지는 화려한 거대로봇의 변신과 액션과는 달리 1회가 시작된 뒤 한참이 지나도 기대하던 화려한 액션은 잘 나오지가 않았다. 주인공은 그다지 뛰어난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닌 거 같아서 주어진 주역 메카닉을 제대로 다루지도 못해서 합체와 변신을 훈련하는 것만으로도 몇 회를 허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내용에 실망을 거듭하던 기억이 난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나름대로 묻지마 액션을 지양하고 서사를 착착 쌓아나가려는 시도였을텐데, 국민학생 입장에서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내용으로 다가왔기 때문일테다. 방영시간도 처음에는 일요일 아침이었는데, 어느 순간 다른 요일의 저녁 시간으로 옮겨진 뒤, 또다른 시간대로 옮겨지는 등 인기가 떨어진 수입 애니메이션이 겪었을 만한 용두사미스러운 과정을 거치다가 시야에서 사라진 프로그램이었다.

일요일 아침의 애니메이션 경쟁에서 다소 열세였던 KBS에서 1988년 방영을 시작한 '무적의 왕자 라이온'은 열기가 식은 일요일 오전 애니메이션에 대한 활기를 다시 불러일으킨 애니메이션이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고양이과 계열의 수인인 것이 독특했고, 주인공이 가진 검에서 빛이 나와 동료들을 소집하고 힘도 강력해져서 악당들을 물리친다는 내용이 회차마다 반복되는 구성인데, 주인공이 사용하던 검이 장난감으로도 인기를 얻는 등 일정 수준 이상의 인기를 얻기는 했지만 반복되는 패턴이 또한 조금은 질리게 만들기도 했던 애니메이션이었다.

'마르코 폴로의 모험'은 1989년 MBC에서는 일요일 아침에 방영했던 애니메이션이었다. 제목 그대로 아시아로 상행을 떠난 뒤 소년 마르코 폴로를 중심으로 한 일행들이 겪는 모험을 그린 내용인데, 당시에는 마르코 폴로라는 위인의 이름만 알았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배경을 가진 인물인지 몰랐던 상황에서 흥미롭게 보았던 만화영화이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인 마르코 폴로보다 원나라의 황제인 쿠빌라이 칸이 더 인상깊게 기억되고 있다.

이 애니메이션 이후 개인적인 일요일 아침의 애니메이션 세계는 종결을 맞이한 느낌이다. 이후 시기부터는 높아진 연령 특성 상 아마도 애니메이션보다는 각종 쇼프로그램 등의 예능 프로그램에 더 시선이 갔었을테다. 하지만 OTT와 다운로드 콘텐츠가 넘쳐나는 지금 그 시절 어린아이의 흥미를 가득 채웠던 이 애니메이션들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