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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행일기
AFKN, 그리고 WWF 본문

AFKN이라는 게 있었다. 한 때 존재했던 공중파 TV채널과 방송국의 명칭이다.
이걸 처음부터 설명해야 하는 시대가 올 줄은, 아니 사실 설명할 수 있는 나이가 될 줄은 몰랐다.^^
AFKN은 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의 준말이다. 한글로 번역하면 '주한미군방송'쯤 되겠다.
이게 왜 있어야 했는지는 무슨 자료를 찾아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거 같다. 우리나라에 주둔한 미군은 주둔 역사에 걸쳐 최대 6만명까지 늘어났었고, 현재는 대략 28,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미군 숫자만 3만명이라고 본다면 기혼자에 따른 배우자 및 자녀까지 더하면 약 5만 명의 미국 국적인들이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뭐 지금이야 그들에게 별도의 미디어가 제공될 필요가 없을 것이지만, 이게 대략 90년대 중반 이전까지의 시기라고 생각해보자. 5만 명에 달라는 이들에게 일상적으로 제공되는 미디어 수단이 매우 불균형스러워진다. TV가 보편적이지 않은 50년대 정도라면 모를까, 방송을 통한 뉴스와 엔터테인먼트에 이미 익숙해진 그들 입장에선 거주환경과는 또다른 열악한 환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AFKN은 그래서 생겨났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명칭이 AFN으로 변경된 걸로 봐서는 예전엔 주둔 국가마다 별도의 명칭을 가지고 운영했던 것을 전세계 통합을 이뤄낸 거 같다. 주일미군방송은 AFJN이었을테고, 주독미군방송은 AFGN이었지 않을까 싶다.
채널이 하나였으니 당연히 종합채널방식으로 운영되었다. 한 채널에 뉴스와 엔터테인먼트 등이 종합적으로 들어있는 구성이었는데, 특이한 점은 미군방송이었으니 뉴스 등을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이들도 다 정복을 입은 미군들이었다는 점이다.

당연히 유선방송이나 셋탑박스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이니, 당연히 이 방송채널은 공중파였다.(라디오도 있는데 이건 뭐 지금은 주제에서 제외하고 얘기하자.) 역시나 당연히 공중파라는 건 주한미군이 아니라 우리나라 일반인들도 다 볼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런고로, 이 채널은 주한미군과 그 가족들뿐만이 아니라 한국인들에게도 나름 유용한(?) 채널이기도 했다. 종합편성방송이니 당연히 방영되는 프로그램에는 미국 현지에서 방영되는 각종 쇼프로그램과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고, 이는 글로벌 관점에서 적어도 내부적으로는 폐쇄적이었던 80년대 국내환경에서 해외의 미디어를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경로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대다수는 영어에 젬병이었으나 영상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프로그램들이 나름 많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AFKN 방송은 낮에도 방송을 멈추지 않았다.(국내 방송사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방송을 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AFKN에서 보았던 프로그램 중 가장 먼저 기억이 나는 건 '웨스트월드'이다. 이 영화는 주말의 명화인지 토요명화인지에서도 더빙을 통해 '이색지대'라는 명칭으로 방영을 했던 영화인데, 국내 방송사 방영 전에 AFKN에서 방영하는 영화로 먼저 본 기억이 있다. 성인들을 위한 일종의 가상현실체험 엔터테인먼트 공간으로서 만들어진 일종의 서부시대 민속촌에서 NPC 역할을 하던 로봇이 이상작동을 하면서 주인공을 죽이러 뒤쫓고 주인공은 이 뒤쫓는 로봇과 치열한 혈투를 벌인 끝에 위기를 벗어난다는 설정은 지금에서도 리메이트가 될 정도로 신선한데, 당시로서는 정말 흥미진진한 설정이었다. 대사는 하나도 알아먹을 수 없었지만 악역을 맡은 율 브리너의 강력한 포스와 연기력에 손에 땀을 쥐면서 봤던 영화였다. 아마 이 영화가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모티브가 아니었을까?

두번째로 기억나는 건 사실 정확하게 제목을 기억하지 못하는 영화 하나이다. 어느날 집 주인 남자가 집 밖으로 나가려고 하니 문이 어떤 벽으로 가로막혀 있고, 집을 살펴보니 집 주변이 모조리 단단한 벽으로 가로막혀 나갈 수가 없는 상태란 걸 알아차린다. 영화인지 드라마인지 알 수 없는 이 프로그램 진행 내내 남자는 그 벽을 뚫고자 애를 쓰는데, 그 와중에 벽난로로 연결된 굴뚝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재들이 떨어져서 쌓이기 시작한다. 충격적인 건 마지막 장면에서 사실 이 집은 어떤 어린아이가 가지고 노는 인형의 집이었고, 그 집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썼던 남자와 가족은 모두 인형이었다는 이야기.
사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이 프로그램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기억상으로는 예전의 일반적인 검색을 통해서도 실마리를 찾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시대는 이미 AI의 시대, 질문에 대한 대답은 호러물로 유명한 영국의 제작사인 해머 필름(Hammer Films)에서 제작한 TV 드라마인 '해머 하우스 오브 미스터리 & 서스펜스'라는 프로그램 중 3화인 '차일즈 플레이(Child's Play)'라고 한다. 역시 AI...

'세서미 스트리트'도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이다. 사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안타까운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진행되는 내용은 대충 어린이들을 위한 쇼프로그램이고 재미가 있을 거 같은데 당최 뭐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어느 일요일 아침 시간에 채널을 돌리다가 나온 고질라 영화 하나도 기억에 남는다. 사실 고질라라는 존재를 이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고질라라는 괴수와 그 자식으로 보이는 아기 괴수가 나오는 영화였는데, 다양한 괴수들이 나와서 각축을 벌이다가 고질라한테 다 컷당한다는 내용인데, 국민학생 입장에서는 꽤나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였다. 찾아보니이 영화는 일본에서 1967년에 만든 '괴수섬의 결전: 고지라의 아들'이라는 고질라 시리즈 중 하나라고 한다.
AFKN에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보았던 또 하나의 프로그램은 마크로스+모스피다였다. 대략 일요일 오전에 방영을 해주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재밌는 건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었지만, 이 AFKN에서 '로보텍'이라는 이름으로 방영해 준 애니메이션은 엄연히 다른 '마크로스'와 '기갑창세기 모스피다'를 뒤섞에 편집한 괴작이었다. 애들 보는 거라고 대충 스토리 개연성은 개나 주고 그림이 움직이면 됐지...라고 생각했던 한 한국뿐만이 아니었던 거 같다.
나열한대로 AFKN에서는 나름 볼거리가 많았긴 하다. 하지만 이 채널을 주로 보기에는 언어의 장벽이라는 무시못할 장애물이 있어서 한계가 있었는데, 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이 채널의 시청률을 폭발적으로 상승시킨 프로그램이 등장한다.

그 주인공은 바로 WWF(World Wrestling Federation)였다. 사실 80년대 후반 국민학생은 이전까지 프로레슬링을 크게 경험하지 못했던 세대이다.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아마도 70년대가 끝나기 전에 바닥까지 추락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이 스포츠의 인기를 다시금 끌어올린게 바로 AFKN에서 방영했던 WWF 방송이었다.

WWF의 인기는 적어도 국민학생-중학생들에게는 절대적이었다. 헐크 호건과 얼티밋 워리어는 당장 모든 학용품에 도배가 되었고, AFKN의 방영시간이 토요일 오후였던고로 본방사수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AFKN은 국내 공중파 방송에 비해서 수신이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역시 이게 무슨 의미인지를 요즘 애들은 모를 것이다.) 그 지직거리는 화면과 소리를 잡겠다고 옥상에 올라가서 안테나를 이리저리 기울이던 기억이 남아있다.
어느 순간 WWF는 더이상 방송을 하지 않았고 우리는 이 채널에 대한 흥미를 조금씩 잃어갔는데, 90년대로 접어들면서 AFKN의 인기는 다른 분야를 통해 유지되었는데, 그건 바로 뮤직비디오 때문이다.
90년대는 음악을 듣는 시대에서 보는 시대로 본격적으로 바뀌던 시기였다. 국내음악이야 당연히 이전 시기부터 TV쇼를 통해 접할 수 있었지만, 팝송을 비롯한 해외음악은 그렇지 못했던 시절이 그 이전까지의 시기였는데, 최신 트랜드를 반영한 팝송이 등장하면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게 당연하게 되던 시절이 바로 90년대이고, 이러한 흐름은 AFKN의 프로그램에도 영향을 미쳤다. AFKN에는 수시로 최신 팝송의 뮤직비디오가 방영되었고, 90년대 초반 이미 청소년에 접어든 우리는 이 AFKN에서 방영되던 뮤비에 빠져들었다. 이건 굳이 개인적인 경험이 아닌 것이 현재까지 활동하는 수많은 대중가수들이 동시기에 이 채널을 통해 그 세계로의 진입을 꿈꾸었다고 하니, 전국적이고 전세대에 걸친 현상이었으리라.
AFKN은 한국 공중파 방송이 아날로그 방송 송출을 중단하면서 일반적인 TV로는 수신이 불가능해졌다고 한다. 지금은 AFN이라는 전세계 통합 방송으로 재편되어 여전히 방송중이라고 하는데, 위성을 통한 수신만 가능하다고 한다.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AFKN을 TV로 볼 수 있었던 지역은 전국이 아니었다고 한다. 미군 기지가 있는 도시에서 전파를 송출하였고, 당연히 그 전파 범위 내에서만 수신이 가능했다고 하는데, 글을 쓰는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다. 대구 시내였지만 미군부대와 가까운 거리에 살 때와 먼 지역에 살 때의 수신 감도가 달랐던 이유를 이제야 알 같기도 하다. 그럼 미군부대가 없는 지역에 살던 동년배들은 동 시기에 헐크 호건이나 얼티밋 워리어, 마초맨이 뭔지도 몰랐다는 얘기잖아....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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