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 이 영화는 수많은 리뷰어들에 의해서 해부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에는 이 해부는 얼마간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다. 영화에 대한 단순한 리뷰가 아니라 해부 수준의 분석이 길게 이어질 것 같은 이유는 애초에 얼마 남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원작자의 생물학적 수명과 작가로서의 수명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이 마케팅을 하지 않는 것을 마케팅으로 한다는 제작진의 폐쇄적인 태도와 결합됐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영화의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안고 극장에 입장하는 이들을 대량생산했다. 게다가 실제로 이 영화는 해부하는 것이 쉽지 않다. 난이도도 높은데, 해부하는 접근방식도 수천 가지가 넘을 수도 있을 것처럼 보인다.
모든 예술적 결과물들은 작가가 면벽수련을 하면서 오롯이 자기만족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면, - 애초에 그렇다면 ‘작가’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어렵지만 - 당연히 그 작가의 내면에 쌓여진 것들을 표현한 창조물인 동시에 대중과의 소통을 염두에 둔 ‘생산품’이다. 대중과의 소통이라고 고급스럽게 표현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를 곧 ‘상업성’이라는 용어로 직역해도 상스럽게 느껴지던 시기는 한참 전에 지나가 버렸다.
거장의 커밍아웃?
그런 차원에서 이전까지의 작품들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스스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여느 다른 애니메이션 작가들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풀어나간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분명히 결과적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이지만, 그의 작품들이 '상업적'이라고 취급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이걸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어떤 시각에서는 작가 자신의 내면에 쌓인 퇴적물들을 아주 잘 정제하고 가공한 다음, 포장지까지 잘 입혀서 내놓은 영민한 전략의 성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제와 가공, 포장의 성과는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되려 다른 형태의 압박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있다. 아마도 그 압박이 시작된 것은 1997년 개봉한 '모노노케 히메'에서부터일 것이다.

'모노노케 히메'는 1997년 개봉 당시 일본 관객만 1300만 명을 동원하면서 일본 영화 역사상 흥행 1위를 찍었고, 각종 시상식의 수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불과 4년 후인 2001년의 -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의 기준에서는 엄청난 속도이다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전작의 기록을 모조리 깨버렸고 아카데미상에다가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까지 수상했다. 그리고 역시 '불과' 3년 만인 2004년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그 후 2008년의 '벼랑 위의 포뇨'에 이르기까지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는 10년 동안 역대 일본 영화 흥행 Top 10 중 4개의 작품을 쏟아냈다. 애니메이션 흥행 순위가 아니라 영화 전체의 흥행 수입이고, 이건 2023년 현재의 기준에도 부합된다. 야구로 따지면 4연타석 만루홈런을 친 셈이라고 해야 할까.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거장’이라는 타이틀이 따라붙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즈음부터다. 그 전까지도 그를 거장이라고 부르고 인정하는 이들도 종종 있었지만, 애니메이션 분야에 일정 수준 이상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다수 대중에게 그는 아이들과 같이 볼 수 있는 훌륭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뛰어난 애니메이션 감독 정도로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모노노케 히메'에서부터 그에게는 평화주의자, 반전주의자, 혹은 생태주의자라는 작가의 본업과는 별개의 거창한 수식어가 따라붙기 시작했고, 이는 작품의 질적 수준에 대한 호평과 결합되어 결국 그에게 거장이라는 압축적인 타이틀이 붙여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보다 정확하게 말해본다면, 현재 시점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높은 수준의 기술적 숙련도를 가진 장인에 대한 존경이라는 '거장'이라는 용어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있는 느낌이다. 일종의 철학가, 사상가,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한 지식과 철학과 의지를 공고하게 구축한 인물 등처럼 취급되는 경우도 많다. 아마도 이걸 상대적으로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Guru'라는 영어 표현일 것이다. 스승, 사부, 도사 등의 용어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그 뉘앙스를 정확하게 전달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작품은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보게들,
나는 그대들이 그렇게 떠받드는 것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인생을 통해 쌓여진
모순, 부조리, 부끄러움, 상처, 흉터를 여전히 떠안고 있는 사람이고,
그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그저그런 사람일 뿐이다.
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확고한 철학과 의지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변곡점으로서의 '붉은 돼지'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신의 내적 취향이나 로망들을 제대로 드러내기 시작한 작품은 1992년의 ‘붉은 돼지’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일본항공(JAL)의 기내에서 비행(飛行)을 주제로 한 단편 애니메이션을 보여주자라는 의도로 기획되었고, 그래서 일반 대중에 의한 흥행과는 별 관계가 없는 ‘맡겨진 일’이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나 지브리에게 이 작품은 개봉에 따른 흥행에 대한 부담이 0에 가까운 작품이었다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흥행에 대한 부담이 없다손 치더라도 맡겨진 일을 특성 상 내 멋대로 만들어도 되는 것은 아닐지언데, 그는 이 작품을 자기 멋대로 만들어 버린다. 애초에 15분~30분 정도로 예정된 분량의 약속도 지키지 않고, 작품 내용도 소년 소녀가 비행에 대한 꿈을 이야기한다는 초기의 기획도 대부분 무시하고 전체주의에 대한 비아냥에다가 아나키즘, 하늘과 항공기, 아드리아해 인근 지역 등에 대한 개인적 로망, 그리고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까지 녹인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버렸다. 당시에도 지브리의 전반적인 운영을 담당했던 스즈키 토시오가 미야자키의 이름만을 믿고 제작을 맡겼던 JAL 경영진의 결과물에 대한 황당함을 무마시킨다고 진땀을 뺐었다고 한다.

그래서 '붉은 돼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목록에서 일종의 변곡점같은 작품이다. 아마도 이 작품에서부터 그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들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표현해도 되겠다는 결심을 한 것처럼 보인다. 다르게 말하면, 이제부터는 한 번 내 멋대로 만들어보자!라고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다음으로 이어지는 장편 작품이 바로 '모노노케 히메'가 되는 것이고, 4연타석 만루홈런으로 이어지는 것일테다.
이쯤 되면 90분이 넘는 장편이 되어버린 이 작품을 원래의 기획 의도대로 기내 상영용으로 써먹지도 못했는데, 이사회를 개최해서 회사의 정관까지 변경한 뒤 '붉은 돼지'의 투자자 역할까지 맡은 일본항공(JAL)이 현재의 미야자키 하야오를 만든 공신 중 하나라고 해야 한다.
두 번째 변곡점 : '바람이 분다' - 빤쓰를 벗은 미야자키 하야오

‘모노노케 히메’에서부터 '벼랑 위의 포뇨'에 이르는 4연타석 만루홈런 이후부터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펜대에 얽힌 족쇄를 걷어차도 되겠다는 일련의 결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런 결심의 결과는 2013년 개봉한 ‘바람이 분다’이다.
이 작품은 개봉 직후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일본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는데, 이 두 나라 간의 논란은 다소 양상이 다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개인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높지 않은 우리나라의 반응이 군국주의 옹호에 대한 의심이 섞인 논란이었다면, 일본 내에서 다수 대중의 반응은 기이하다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적어도 일본 내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군국주의에 옹호적인 입장을 가진다는 건 조계종 종정이 카톨릭 세례를 받는다는 얘기랑 동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이했다. 애초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성장과정의 산물로써 밀리터리, 특히 항공기 쪽에 상당한 로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이긴 한데, 작가가 그런 취향을 가진 건 가진거고, 만들어낸 작품의 주인공이 군용기, 그것도 태평양 전쟁과 군국주의의 상징물 그 자체인 제로센의 개발자라는 점, 그리고 작품 내에서 그 주인공의 행보가 딱히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어떤 반응을 불러올지를 미야자키 하야오 스스로와 스즈키 토시오라는 영민한 프로듀서가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기이한 의문에 대한 실마리는 의외의 두 인물에게서 발견된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일생의 라이벌로 인식되는 기동전사 건담의 원작자 토미노 요시유키는 ‘바람이 분다’의 시사회에 참석한 이후, 감상평을 묻는 이들에게 “완패(完敗)했다”라는 한 마디로 대답했는데, 두 거장의 라이벌 구도가 주로 토미노 요시유키의 일방적인 경쟁심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글로벌한 흥행 결과를 낳은 그 4연타석 전작들이 아니라 굳이 이 작품을 보고나서 갑자기 패배를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이 발언은 미야자키 하야오와 토미노 요시유키 둘 모두의 제자라고 인정받는 안노 히데아키가 토미노 요시유키와의 대담에서 했던 두 스승에 대한 평가와 이어진다.
“토미노 선생님의 작품은
토미노 선생님께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자X를 덜렁거리며 춤을 추는 느낌이라 존경합니다만,
미야자키 선생님의 작품은
‘나 지금 벌거벗었다~’라고 외치면서도
하반신에는 멋드러진 빤쓰를 입고 있는 느낌입니다.”
스승과 제자가 자리에 없는 또 다른 스승 하나를 낄낄대며 까는 대담의 전말은 각설하고, 안노 히데아키의 스승에 대한 이 코멘트와 토미노의 완패했다라는 평가를 엮어본다면 하나의 재미있는 가설에 다다르게 된다.
그 가설은 아마도 ‘바람이 분다’에서부터 미야자키 하야오는 대중의 반응에 대한 두려움을 떠나 있는 그대로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기로 한 것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안노 히데아키의 표현대로라면 멋드러진 빤쓰까지 홀라당 벗어버린 것일테다. 전쟁을 싫어하고, 파시즘을 혐오하면서도 군용기, 그것도 태평양전쟁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제로센에 대한 로망을 간직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 버렸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아마도 토미노 요시유키의 패배 인정은 노년이 다 된 이제서야 위선에서 벗어나 그 멋드러진 빤스를 벗어던진 것도 놀라운데, 그렇게 나체로 덜렁거리는 모습(...)이 애초부터 깨벗고 설친 자신의 것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웠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애초에 이 필생의 라이벌에게 비교우위를 느낀 것이 자신의 부끄럽고 모순된 내면을 숨김없이 덜렁거렸다(?)는 것이었는데, 이젠 그 상대적 우월감의 포인트마저 잃어버렸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자기 모순과 자해, 그리고 흉터
그 해석의 연장선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그렇게 빤스를 벗어던진 전작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것처럼 보인다. 이건 그냥 덜렁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신의 모순된 내면에 돋보기를 갖다대고 보여주는 느낌이다.
이 작품의 스토리는 미야자키 하야오 그 자신의 유년기와 높은 싱크로율을 보인다. 이 영화는 다중적인 해석이 가능한 수많은 알레고리로 점철되어 있지만, 주인공을 둘러싼 스토리의 핵심은 그의 유년기에서부터의 경험과 그로 인해 축척된 내재적 모순을 거의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1살 초등학생인 주인공 마키 마히토가 맞딱뜨리게 되는 모순적인 세계와 스스로의 모습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유년시절의 배경 및 자신의 모습과 거의 흡사하다. 어머니의 입원, 공습을 피한 피난길, 전시체제로 나라 전체가 쪼달리는 상황임에도 군용기 부품 생산이라는 가업으로 인해 풍족한 환경, 분명히 전쟁에 기여하고 있음에도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고 군국주의같이 방향은 글렀지만 무언가 확고한 신념을 가진 것도 아니라 그저 전쟁에 의해 발생하는 금전적 이익에만 뿌듯해하는 아버지의 태도 등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과 완전하게 동일하다. 그리고 주변에 비해 이질적인 자신의 환경과 그 근원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만, 이 거부감이 드는 이질적인 환경에 의한 수혜를 능동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냉담한 눈빛만 보낼 뿐인 자신의 모순 또한 마찬가지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1944년의 도쿄 대공습의 피난길에 자신과 가족이 탄 트럭이 제발 태워달라고 애원하는 갓난아이를 안은 여인을 외면하고 지나칠 때, 그 안타까운 모자가 멀어져가는 순간에 그들을 태워주자고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기억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만화영화를 만든다면 그런 말을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그리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다짐과 상관 없이, 그 때 그런 말을 하지 못했던 것, 혹은 하지 않았던 것 자체는 지울 수 없는 기억, 모순, 부끄러움으로 남는다. 청년기에 이르러서는 아버지에게 사실상 전범이 아니냐고 매몰찬 발언까지 내뱉었지만, 한편으로는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군용기에 대한 로망을 가슴 속에 품어 탱크와 전투기로 그림 연습을 했다. 전범이라고 했던 바로 그 아버지가 주는 용돈으로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책을 샀고, 그 엄혹한 생존의 시기에 '그림 따위'나 그리고 있었으며, 미대로 진학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마저 관철하지 못하고 결국 그 아버지에게 굴복하여 가쿠슈인이라는 귀족 대학에 진학한다. 전공투가 한창이던 시절, 경찰의 폭력진압에 충격을 받고 반발하여 학생시위에 가담해서 활동도 하지만, 여전히 그는 그 엄중한 시대에 만화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는 팔자 좋은 꿈을 꾸는 대학생이었다. 자랄수록 그가 가진 모순은 사라지기는커녕 더 늘어만 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전시체제의 시대에 다른 동급생들이 수업이 아니라 근로봉사를 준비하고 있는 와중에 아버지의 검은색 승용차를 타고 먼지를 휘날리며 전학생으로 등장한 뒤, 여전히 그 아이들이 노동에 투입된 와중에 열외의 대상으로 그걸 지나치며 가는 하교길. 시비를 거는 동급생들과 갈등을 빚는 주인공의 모습은 그러한 자기모순에 대한 은유, 그리고 동시에 해석이다. 그 장면을 자세히 돌이켜보면 주인공과 동급생의 갈등은 일방적인 린치가 아니라 ‘다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이 본능적으로 아니꼬움을 느낀 동급생들의 시비에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저항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는 그 이후 홀로 걸어가는 길에서 자신의 머리를 돌로 찍는 자해의 장면으로 이어진다.
복잡하다, 그리고 불확실하다. 주인공이 자신이 가진 모순, 혹은 잘 먹고 잘 삶이 일종의 흠결이자 혐의점이라는 것을 완전하게 수긍하여 받아들인다면, 그 자해는 동급생들과 다툼을 할 것이 아니라 그냥 순순히 두드려 맞아서 입어야 했을 상처를 스스로 내버리는 일종의 역(逆) 보상기제일 것이다. 그 기저에는 죄책감, 자괴감, 혹은 초등학생이 받아들이기 힘든 모순에 대한 반항 등등이 복잡하고도 불확실하게 뒤섞여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자해는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는다. 아버지는 머리가 길면 겉으로는 보이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흉터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겉으로 보이지 않으면 별일 아니라고 하는 아버지의 대사도 나름 의미심장하다. 그건 그가 경멸하던 기성세대의 사고방식 그 자체이다.
위험과 매혹이 모호하게 혼재된 환상의 세계

그 이후 이어지는 주인공의 행로는 비현실적이다.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겪는 환상적인 행로와 유사하다. 그 환상의 세계에서 등장하는 것들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위협적인 악당인 것 같기도 한 반면, 한편으로는 귀엽게 보이거나, 자기 나름대로의 일들을 열심히 하는 존재들이거나, 혹은 당당하게 나름의 정의를 지키려고 애쓰는 존재들로 보이기도 한다. 이 부분은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을 입체적으로 그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성향 그대로이다.
여기서부터는 보는 이들의 해석이 다들 제각각이 될 수 있는 영역이다. 어찌저씨해서 들어간 기괴한 탑과 그 안에서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는 누군가에게는 애니메이션 제작의 세계이고, 누구에게는 어떤 국가나 세계, 혹은 초고도 성장기의 쉴 틈 없는 세상이기도 할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진행 중인 자기의 인생을 둘러싼 세계일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수천, 수만의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주인공의 행적에 대한 해석의 범위를 표현의 주체인 미야자키 하야오로 좁혀보자. 이 환상의 세계에서 주인공은 네 번의 중요한 등장인물과의 만남을 가진다. 그리고 이 네 번의 만남의 대상은 현실세계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생에서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들이다. 사실 이 해석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심지어 스즈키 토시오가 공식적인 인터뷰에서 언급한 해석과도 차이가 나니, 헛소리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건방지게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 해석이 더 적절하다.
참고로, 이 환상의 세계의 입구로 주인공을 유인하고, 그 세계 내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종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왜가리는 바로 스즈키 토시오이다. 이건 뭐 본인 스스로가 왜가리는 자신을 상징한다라고도 했고 개인적인 해석도 일치하니 생략한다.
뱃사공 키리코 : 타카하타 이사오

무언가 위험해보이지만 아름답기 그지없는 바닷가의 어느 집. 주인공은 대문에 쓰인 나를 배우면 죽을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 집에 들어간다. 들어가는 경위 또한 애매하다. 마히토는 자신의 의지로 이 세계에 입장했다기 보다는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팰리컨떼에 떠밀려 입장한다.
어쨌거나 그렇게 진입한 뒤 주인공이 마주친 망망대해는 아마도 미야자키 하야오가 발을 들여 놓은 애니메이션 제작의 세계일 것이다. 넓게 보면 창작의 세계, 예술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름답지만 망망대해인 곳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은 주인공을 목적지까지 배를 태워주는 씩씩한 뱃사공 키리코이다.

이 키리코가 은유하는 대상은 바로 타카하타 이사오이다. ‘반딧불이의 묘’ 등의 작품으로 역시 거장으로 평가받는 이 사람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도에이 4년 입사 선배이자, 애니메이션 바닥에 입문해서 그 바닥의 생리를 1도 모르는 신입 애니메이터 미야자키를 이끌어준 사람이다. 제작의 기술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미야자키를 직장의 환경과 처우 문제까지 관여하는 도에이의 노조 간부 노릇까지 하게 만들었던, 그야말로 망망대해에서 처음 만나게 된 친절한 뱃사공이었던 것이다. 그는 미야자키에게 평생의 절친이자, 멘토이며, 그가 죽을 때까지 라이벌로 인정한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키리코의 배를 타고 가는 그 망망대해의 수평선에는 떼를 지어 배들이 어딘가로 항해하고 있다. 배를 젓는 키리코는 마히토에게 저들 중 상당수는 이미 죽어있는 놈들이라고 한다. 아까의 그 집 대문에 적혀있던 글귀와 일치하는 내용이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은 ‘붉은 돼지’의 주인공이 아직 인간인 ‘마르코’였을 시절, 생사의 갈림길의 몽환에서 마주쳤던 비행기떼가 등장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다만 그 장면을 둘러싼 디테일한 상황과 그에 따른 해석은 다소 상이하다. '붉은 돼지'의 비행기들은 적이건 아군이건 모두 하늘과 비행기에 열정으로 미쳤던 인간들이 타고 있는 것들이었고, 이미 현실의 세계를 떠난 이들이었음에도 여전히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는 이들이었다. 반면, 이 작품에서 수평선에 걸쳐 지나가는 수많은 배들 역시 비현실적인 곳에서 비현실적인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 이들이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이미 죽어있다라고 언급된다.
어찌보면 둘 다 비현실적인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대상에 대한 설명과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시선은 다소 다르다. 비현실의 세계에서 삶과 죽음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키리코가 말하는 삶과 죽음의 상태는 어떤 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그 수많은 배들이 모두 같은 종류, 같은 수준의 것은 아니고, 제대로 된 것들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의미일테다.
30년 전의 미야자키에게 저 높은 하늘 위로 날아가는 모든 비행기들은 동일하게 저기 같이 끼어서 날아가고 싶거나, 혹은 달려들어가 구해내야 할 안타까움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의 이 수평선에 늘어서서 항해하는 배들은 산 자과 죽은 자가 구분되는 대상이다. 더구나 주인공을 태운 배는 저 무리에 끼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자기만의 뱃길을 간다. 물론 '붉은 돼지'에서도 주인공은 날아가는 그 무리에 끼지 못한다. 하지만 그 때와 달리 지금은 그 무리에 끼지 않는 것이 사뭇 능동적이다. 이건 애니메이션 바닥에서의 자신의 입지나 의지를 은유하는 것일 수도 있고,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의 현재의 모습이나 의지를 은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
히사코, 멀어져 가던 여인
주인공이 환상의 세계로 뛰어든 목적은 화재로 숨진 어머니의 여동생, 즉 이모이자, 새엄마인 히사코의 구출이다. 그녀가 상징하는 것 또한 매우 복합적이고 복잡하다.

히사코가 이모이자 새엄마라는 점은 주인공에게 다가오는 세상의 모순, 부조리함 그 자체이다. 화재로 죽은 어머니의 기억이 생생한 가운데 안그래도 탐탁치 않은 아버지로부터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새엄마이자 배다른 동생을 뱃속에 품고 있는 사람이다. 당연하게도 거부감이 들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대상이지만, 한편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고, 실제로 적극적으로 거부하지도 못했던 대상이다. 오히려 표면적으로는 건조할 지언정 정중하고 공손하게 대해야 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어느날 그녀가 무언가에 이끌려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 주인공이 외면했던 대상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그녀가 한밤중에 어두컴컴한 숲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분명히 목도했고, 그 사라지는 뒷모습이 그녀라는 걸, 그리고 그녀가 그 어두운 숲으로 들어간다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별일 아닐 것이라는, 혹은 잘못 본 걸 수도 있다라는 변명에 기반한 별 생각없는 외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따져보면 그 변명은 남들이 볼 때에는 수긍할 수는 있어도 주인공의 내재적으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적극적인 방치이자 미필적 고의이다. 뭐, 난 모르겠다 내지는 나랑 뭔 상관인가라는... 마히토는 그 자리에서 벌떡 뛰쳐나와서 새엄마가 숲속으로 사라졌다고 외쳐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저 이불을 뒤집어쓰고 외면한다.
그래서 아마도 히사코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피난길에 실려가는 트럭에서 멀어져가며 '바라보기만'했던 갓난아이를 안은 여인일 것이다. 그 여인은 미야자키에게 평생토록 가슴에 머무르며 자기 작품의 등장인물과 내용, 심지어 자신의 인생 행로를 결정짓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 원인이자 동력이었지만, 어쨌거나 결국 현실에서는 구하지 못했던, 혹은 구하지 않았던 대상이다. 그녀는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내면의 양심인 동시에 그 양심을 배반했던 과거에 대한 자괴감 내지 무기력함을 복합적으로 상징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인 마히토는 그의 이전 작품의 주인공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만약에 주인공이 '바람이 분다' 이전까지의 소년 소녀 주인공이었다면 애초에 히사코가 숲으로 사라질 때 그냥 이불을 뒤집어쓰는 방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래소년 코난이었다면 창을 들고 맨발로 뛰쳐나갔을 것이고, 아시타카, 혹은 산이었다면 야클이나 늑대를 타고 숲으로 돌진했을 것이다.
때문에 마히토의 행동은 미야자키의 ‘그 여인을 태워야 한다고 외칠 수 있는 소년과 소녀를 주인공으로 그리겠다’라는 젊은 시절의 다짐이 그저 다짐이었을 뿐, 혹은 그래봤자 애니메이션이라는 비현실의 세계 따위에 반영했던 변명일 뿐, 현실 세계에서 그녀와 그 갓난아이를 외면했던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 부끄러운 기억으로 엄연히 존재한다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일테다.

그래서 마히토가 이 환상의 세계에서 히사코를 구하고자 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절망적인 장면이면서 복잡한 의미를 가진 장면이다. 마히토는 히사코를 구하지 못한다. 주인공이 히사코를 구하려고 들어간 곳은 뱃속의 아이, 즉 주인공의 조카이자 동생을 출산하기 위한 히사코의 산실(産室)이다. 그 공간에 쳐진 종이들은 우리의 금줄처럼 일본의 신도(神道)에서 액막이로 쓰이는 고헤이(御幣)이지만, 히사코에게 접근하는 주인공을 휘감을 때에는 마치 애니메이션 원화 용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히토는 그 종이에 휘감겨 숨이 막히면서도 그녀를 데리고 돌아가려고 울부짖지만, 결국 그녀를 구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그것도 그녀에게 “니가 여기 왜 왔냐!”라는 거센 타박까지 들으면서.
이건 마치 정작 자신이 어두컴컴한 숲으로 사라지는 순간, 혹은 트럭 뒤편 너머로 울부짖으며 멀어지던 순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외면하더니, 이제 와서 무슨 위선으로 자기를 구하려고 하는거냐는 타박인 것처럼 느껴진다. 평생 동안 원화 종이에 숨이 막히도록 파묻혀 외면받아 멀어져 가던 모자를 떠올리며 했던 노력들이 이제와서 돌이켜보니 다 위선일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본인이 이렇게 은유하는 데 어쩔것인가...
히미 : 엄마

주인공은 이 환상의 세계에서 젊은 시절의 엄마를 만난다. 그녀는 이 환상의 세계에서 만난 마히토를 반갑게 맞이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마히토를 지켜주며, 현실의 길로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한다. 사실 이건 은유가 아니다. 그녀는 주인공의 엄마인 동시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엄마이다. 화재로 인해 불꽃으로 화하여 환상의 세계의 존재가 된 엄마이자, 어린 시절의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바로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을 권해준 엄마이다.
그녀는 이 작품의 등장인물 중 가장 해석할 필요가 없는 존재이다. 그냥 엄마다. 모든 인류에게 엄마는 그냥 엄마이다. 가상의 마히토이건, 현실의 미야자키 하야오이건, 어디 지구 구석의 원주민이건, 슈퍼맨이건 배트맨이건 간에 엄마는 엄마이다. 달리 무얼 더 말할 것인가.
우화등선(羽化登仙)의 포기, 그리고 드러낸 흉터

마히토는 이 여정의 끝에서 이 환상의 세계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큰할아버지를 만난다. 그는 이 세계의 조정자이자 주관자이며, 동시에 하늘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바위에 의해 언제든지 멸망할 수 있는 이 세계를 악에 물들지 않은 13개의 돌의 조합을 통해 지켜내는 수호자이다.
이 큰할아버지는 스즈키 토시오의 인터뷰에 의해 타카하타 이사오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알려졌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엄하게도(?) 이 해석은 좀 부족한 것이 아닌가라는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타카하타 이사오는 미야자키에게 신뢰하고 의지할만한 동료이자 선배였지, 우러러 바라보는 지고의 대상이자 권능을 가진 존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환상의 세계에서 마치 신과 같은 위상을 보여주는 노인네를 보고 떠오른 인물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신이라고 일컬어지는 '데즈카 오사무'였다. 그리고 거기에 중첩된 이미지로 떠오르는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었다.
데즈카 오사무는 그야말로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신적 존재이다. 그 이름 아래 일본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모든 기법이 시작되었으며, 만화와 애니메이션 업계와 시장의 창조자이며, 타카하타 이사오, 토미노 요시유키, 데자키 오사무, 카와지리 요시아키 등 1960년대 이래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이라고 불리운 이들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무시 프로덕션’의 창업주였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앞서 언급했듯이 미야자키 하야오를 애니메이션 세계로 끌어들인 원동력이며, 어린 시절부터의 지향점 같은 사람인 동시에, 그것이 자의이건 환경에 의한 타의이건 간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발을 들여놓은 환상의 세계의 주인이자 신이다.
한편으로, 큰할아버지는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다. 하늘의 거대한 바위로부터 이 환상의 세계를 지켜내는 수단은 매일매일 다른 조합으로 쌓아올리는 13개의 돌이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 작품 이전까지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을 한 작품의 수도 13개이다. 그리고 그 역시 현재 데즈카 오사무처럼 거장의 수준을 넘어 애니메이션 세계에서 신적인 존재와 가장 가까운 인물이기도 하다.
자, 여기서부터는 또다시 해석이 복잡해진다. 신적인 존재로 보이는 큰할아버지는 환상의 세계의 창조자이면서, 환상의 세계에 평생토록 남아 그 세계를 수호하는 데 일생을 바친 존재인 동시에, 이제는 수명이 다하여 후계자에게 이 임무를 넘겨야 하는 존재이다. 만약 이 신적인 존재가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라면, 이 신적 존재를 마주하여 이 임무를 넘겨받을 것을 권유받는 주인공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다. 환상의 세계에서 13개의 돌을 쌓아 그 세계를 지켜온 신적 존재인 본인이 현실의 세계로부터 막 넘어온 아직 어린 본인에게 자신의 임무와 위치를 상속받으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건 간에, 주인공에게 이 장면은 스스로 신적인 존재로 올라설 수 있는 선택의 순간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이 선택의 순간에서 우화등선(羽化登仙)의 기회를 거부한다. 한 마디의 승낙만 하면 환상의 세계를 다스리며 칭송과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음에도, 마히토는 현실세계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 결심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그의 머리에는 이미 반창고가 떨어져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드러나 있다. 그 흉터는 자신 안의 모순과 부조리의 상징인 동시에 그 모순과 부조리에 당당하게 일어서서 무언가를 외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해의 결과이며, 아마도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을테지만 주인공은 이젠 더 이상 그 흉터를 감추지 않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반창고로 그 흉터를 가진들, 아버지가 말한대로 머리를 길러서 가린들 흉터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흉터라는 것은 그것의 원인이 자해이건 뭐건 간에 상처 자체는 다 나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주인공은 히사코와 함께 탈출하고 이 환상의 세계는 붕괴한다. 환상의 세계, 혹은 비현실의 세계의 신적 존재는 히사코마저 현실 세계로 돌아갔으니 이젠 후계자 선정에도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평생을 쌓아올려 세계를 지켜낸 13개의 돌은 그 세계를 자신이 대신 지켜낼 수 있다고 자신하는 앵무대왕의 난입에 의해 허물어지며 무참하게 파괴된다.
이 또한 복합적이다. 그 소중하게 등장한 13개의 돌이 파괴될 때, 주인공의 반응은, 심지어 그 돌을 쌓던 큰할아버지의 반응도 무덤덤함에 가깝다. 이건 이젠 더이상 데즈카 오사무와 같은 신적 존재가 창조한 환상의 세계, 혹은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이 만들어낸 돌은 그것이 아무리 악의가 없는 것들로만 선별된 것들일지라도 더이상 필요가 없다라는 의미인가, 아니면 그것들은 그저 비현실적인 환상의 세계만 지켜낼 뿐 현실세계에서는 별 소용이 없는 것일 뿐이라는 의미인가.
그 돌들을 파괴하여 그 세계의 파멸을 가져온 앵무대왕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가 사실상 제작자로 물러난 장남 미야자키 고로인 것인가, 아니면 '레이와' 시대에 들어 예술적 기준에서는 더더욱 추락 중인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인물들을 의미하는 것인가...
어쨌거나, 비록 그 붕괴의 직접적인 트리거는 앵무대왕의 개입이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 주인공의 선택에 의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붕괴로 인해 그 세계에 존재하던 것들 중 상당수는 현실적인 존재로 변화되어 현실 세계로 탈출한다.
에필로그 : 은퇴, 안 할 것 같은데?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빤스를 벗었다고 표현하건, 장엄하게 덜렁거린다(?)라고 표현하건, 거장의 스트립쇼라고 표현하건 간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변곡점의 의미를 가지는 작품 중 가장 그 변곡의 규모가 큰 전환적인 작품으로 보인다.(이제와서!)
쌓아올리던 13개의 돌이 자신의 선택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흉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로 하고, 환상의 세계의 신이 되기 보다는 현실의 인간이 되기로 한 마지막 선택은 마히토에게도 중요한 선택이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에게는 더더욱 중요하고도 의미심장한 선택, 혹은 결심으로 보인다. 결국 이 작품은 우화등선한 애니메이션의 신적 존재가 쌓아 올리는 14번째 돌이 아니다. 오히려 우화등선을 포기한, 혹은 멋드러진 빤스를 벗어던지고 덜렁거리기 시작한 현실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첫 번째 돌이다. 그래서 아마도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가장 큰 변곡점으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분명 의문형의 문장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이 제목을 보면서 어떠한 강요를 느낀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질문을 던지는 영감님은 그저 묻고 있을 뿐이다. 그 질문에서 어떻게 살라고 강요를 느끼는 것은 질문을 던지는 자가 아니라 그 질문을 듣는 우리 스스로가 원인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제목 자체 역시 고단수의 의미를 내포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저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 것이라고 이 작품을 통해 얘기할 뿐이다.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이 서술과 질문을 듣는 우리 각자가 알아내고 선택을 해야 할 뿐이다. 이 제목에서 강요를 느낀다면, 그 강요는 아마도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니라 각자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에 의한 강요일 것이다. 그것이 모순이건, 부조리함이건, 부끄러운 기억이건, 상처이건, 흉터이건 간에. 이 영감님은 그저 나는 이제 그것들을 다 보여주고 살기로 했단다, 너희는 어떻게 살 것이냐라고 묻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이 리뷰의 결말은 이렇게 끝맺고자 한다.
이 영감님은 은퇴하지 않을 것 같다.
아마도 앞으로 몇 번 더 덜렁거리며 춤추는 모습을 기대해도 될 것 같다.
만수무강하시라, 영감님...